식빵과 수돗물로만 식사를 해결하고 있었지만, 하루 20달러의 숙박비만 지급해도 AS 180달러가 바닥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내겐 지인(知人)도, 나를 도와줄 수 있는 가족도, 돌아갈 수 있는 조국도 없었다. 박빙(薄氷)의 위태위태함은 그 위를 걸어본 자만이 알 수 있기에 좋은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의 이해는 조금도 구하지 않는다.
Information Center에서 받아온 번호를 들고 (공중전화기로) 몇 군데의 농장에 전화하다 보니 하루 숙박비 이상의 전화비가 지출되었다. 일각도 지체할 수 없는 상황 - 시간보다 다급한 것이 주머니 사정 - 이라 여행사로 직행해서 시드니에서 가장 가까운 농장정보를 구했다. 고속버스로 5시간 거리에 있는 Orange City까지는 요금이 35달러, 기타 농장들까지는 12시간~48시간을 달려야 하는데 편도 할인 버스요금만 150~350달러나 되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Orange City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어서 더 조급했다. 관광지가 아니다 보니 값싼 Backpacker's도 눈에 띄지 않았고 하룻밤 투숙비가 40~50달러나 되는 모텔에 투숙할 만큼의 노자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라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는 노숙을 불사할 각오였다.
땅거미마저 종적을 감추고 완전한 어둠이 도시에 깔리기 시작할 무렵 한 떼의 유럽 배낭족들을 싣고 달리는 트럭을 발견했다. 80kg이나 되는 짐의 무게도 느낄 새 없이 들쳐 메고 무작정 달려갔다. 점심도, 저녁식사도 걸렀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사전에 연락도 취하지 않고 무작정 왔기 때문에 자리가 없으면 못 간다는 말을 먼저 해주고 나서 운전기사가 농장 측에 무전연락을 취했는데 한 자리가 비어 있으니 데려오란다. 아, 얼마나 다행인지….
예약이 필요한 이유는 농장에 도착하고 나서 알게 되었는데 숙소문제 때문이었다. 대부분 그룹으로 예약하고 와서 인원수에 맞는 캠핑카를 제공해주었는데, 유일하게 단신으로 도착한 내겐 두 명이 투숙하기엔 비좁은 1인용 소형차가 제공되었다. 농장 주변에는 가게는커녕 인가(人家)도 하나 없어서 - 음식은 제공해주지 않기 때문에 - 필요한 식료품을 구하려면 날이 밝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여장을 풀고 나니 배고픔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밤 기온은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급격히 떨어져서 - 침낭도, 모포도, 두꺼운 옷가지도 없던 나는 - 첫날부터 잠을 청하지 못하고 추위와 배고픔과 싸워야 했다.
동트기가 무섭게 일이 시작되었는데 3끼를 내리 굶은 터라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 농장에서도 신상명세서를 요구하는데 Tax File Number 칸을 공란으로 비워 놓고 제출해도 농장 측은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당장 시급한 문제는 배고픔….
농장주가 며칠에 한 번 트럭을 몰고 시내로 나갈 때마다 음식이 떨어진 일꾼들이 동승을 한다는데 마침 내가 도착한 다음 날이 그 날이라 첫날 사귄 이탈리아 친구들과 함께 올라탔다. 농장에서 시내까지는 15km, 왕복 30km나 되는 거리인데 농장주는 우리를 시내에 내려만 놓고 알아서 돌아오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돌아갈 길이 막막했다. 농장이 아주 외진 곳에 있어서 대중교통수단도 전혀 없고, 따라서 히치하이킹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체격이 큰 장정 세 명을 목적지까지 태워줄 차를 만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친구들은 고기와 파스타, 온갖 야채, 맥주 2박스 등 카트가 넘칠 정도로 음식을 장만했는데 내 카트에는 계란도, 잼도, 우유도 없이 맨 식빵만 3통이 담겨 있으니 한참을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날 쳐다보다가 결국 "그것만 먹고 중노동을 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던졌다. "물론, 안 되지. 내가 얼마나 위大한 사람인데…." 스페인어로 시작된 내 농담과 우스운 제스처에 그들은 박장대소하고 간밤에 내가 들고 온 엄청난 부피의 짐 속에 음식이 하나 가득 들어 있다는 거짓말을 여과 없이 믿어주었다. 구차한 모습을 굳이 보여줄 필요는 없는 일이다. 내 실상을 알아낸다 해서 의기소침할 내가 아니지만…. 여하튼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기도 했고, 그 농장을 떠나는 날까지 - 내 주식은 오직 식빵과 물이 전부였기 때문에 - 아무도 내가 주방에서 요리하고 식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재미있는 사나이'라는 별명 외에 또 하나 얻은 것은 '의문의 사나이'였다.
한낮의 평균 기온은 섭씨 42℃, 밤 기온은 5℃, 체감온도는 종종 -까지 떨어지니 더위와 동시에 추위와의 싸움, 배고픔까지 더해져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각자의 이름표가 붙은 박스에 자신이 수확한 체리를 담아놓으면 농장주가 무게를 달아서 - kg당 40센트로 - 임금을 기록하는, 즉 능력급 임금제였지만 워낙 무게가 나가지 않는 체리라서 100kg을 수확한다 해도 40달러밖에 안 되는 임금인데 하루 100kg의 수확은 최고의 수확량을 올리고 있던 내게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식료품 장만을 위해 시내에 나갔다오는 날은 - 히치하이킹으로 되돌아오려면 최소 3시간 이상을 허비해야 하므로 - 한나절의 임금을 손해 보니 타격이 더 컸다. 자전거를 끌고 농장에 도착한 영국인 친구가 고맙게도 - 내가 시내에 나갈 때마다 - 그의 자전거를 빌려준 덕분에 더 빨리 다녀올 수 있었지만 굶주린 배를 달래며 내리막길만큼 반복되는 오르막길을 달려 30km를 왕복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식빵 한 통으로 이틀은 버텨야 하는데 세 통을 사오면 나흘도 되지 않아 떨어져서 더 자주 시내에 나가야 했다. 일이 워낙 험하기도 했지만 내 작업 시간은 여느 일꾼들보다 길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외출 때 식빵과 함께 사온 것은 입으로 물 수 있는 소형 플래시였다. 내겐 먼동이 틀 때까지 기다릴 시간적인,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가 잠들어 있는 어두컴컴한 새벽에 - 플래시를 입에 물고 - 일을 시작했고, 점심을 위해 모두가 하산하고 나서도 작업을 멈추는 일이 없었고, 석양이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일 때쯤이면 모두 하루 일과를 완전히 마치고 푸짐한 저녁식사와 긴 휴식을 취하기 위해 하산하지만, 적막한 어둠 속에서도 내 손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밤 10시가 넘어서 밀린 점심과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하산하다 보니 그동안 산밑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친구들로부터 결과만 통보받았는데 임금인상에 대한 문제를 놓고 한바탕 데모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kg당 40센트의 임금은 노동력과 노동시간을 고려해볼 때 부당하다고 생각해서 농장 측이 임금인상요구에 불응하면 전원(全員)이 일을 그만두고 떠나기로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타협안은 하루 만에 종결되었다. 내가 내 민족에게 바라는 것이 바로 그 단결력이다. 그들과 나는 - 나는 생계를 위한 돈을 벌기 위해 온 사람이고, 그들은 여행을 더 즐기기 위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온 이들이라 - 입장이 달랐는데 그들에게도 40센트는 확실히 적은 액수였다.
그들 덕분에 (첫 주급을 받기 전에) 40센트로 기록되던 임금이 50센트로 재계산되었지만, 하루 130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리지 못하면 한 달이 가기 전에 - 부족한 채무액을 메우기 위해 - 또 다른 채무를 져야 하는 나는 몸과 마음이 더욱 분주해졌다. 물집이 잡히면 밴드로 응급조치를 취하고 밴드마저 떨어진 뒤에는 낡은 옷가지를 찢어 동여매고 하루 3시간 이하의 수면시간을 제외하고는 오직 미친 듯이 일만 했지만, 여전히 한강 투석에 지나지 않는 몸부림에 불과했다.
(중략)
만신창이가 되어 시드니로 돌아오고 나서 다음 농장으로 행보하기 전까지 또다시 많은 아픔과 설움을 감수해야 했다. 처음 Orange City로 떠나기 전에 내게 어떤 일거리를 제안했던 한국인 친구가 언제든지 시드니로 돌아오면 시작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지키지 못했다. 그의 말만 믿고 내려온 나로서는 눈앞이 캄캄했지만 그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 약속을 지킬 수 없는 것은 그의 마음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압력 때문임을 알고 있었고, 훗날 그는 내게 가장 큰 도움을 준 은인이 되었다.)
망고 농장에서 두 달간 하루 평균 200달러 이상의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막 내려온 친구를 만나 그가 소개해준 농장으로 가려니 가장 가까운 농장이 고속버스로 약 47시간 거리. 차비만 있다면 50시간이 넘는 거리라도 문제가 아니었다. 남들이 200달러를 번다면 나는 300달러 이상을 벌 수 있는 체력과 정신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Orange City를 떠나기 전날 (내가 일하던) 농장에 도착한 두 한국인 어학 연수생들이 시드니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내겐 돈이 부족하고 그들에겐 언어가 부족하니 시드니에서 상봉해서 호주 생활을 하는 동안 상부상조하기로 약속을 하고 헤어진 뒤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며칠 뒤 약속대로 그들이 내 숙소를 찾아와서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다음날 바로 망고 농장을 향한 북진이 시작되었다. 내게 남은 돈을 다 털어도 차비가 부족해서 농장에 도착하기 전부터 내 빚은 불어났다. 앞으로 2주 안에 430만 원에 상당하는 호주 달러와 이 학생들에게 빌린 돈까지 벌어야 한다.
47시간을 달려 첫 번째 농장 지역에 도착하고 나서 마침 값싼 Backpacker's가 눈에 띄어 여장을 풀고 바로 농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광활한 농장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눈에 띄지 않았고 사무실은 커다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한참 뒤에 행인을 발견해서 연유를 물어보니 이 농장의 망고 수확은 며칠 전에 끝났기 때문이란다. 그에게 물어 다른 망고 농장들을 찾아갔지만 2번째, 3번째, 4번째도 모두 수확이 종료된 뒤라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벌거벗은 농장들이 마치 낯선 이들의 방문을 조소하는 것 같았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중략)
수확이 시작된 지 며칠 되지 않은 자두 농장을 찾았다. 그동안 숙소를 세 번 옮겼고 이동 과정에서 모두의 돈이 바닥났다. 이 주변에서는 Backpacker's를 찾을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하루 55달러나 되는 모텔에서 세 명이 투숙해야 했는데 마음씨 좋은 주인장이 우리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하고 5달러를 할인해주었다. 그래도 당장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노숙을 해야 할 처지라 아주 다급한 상황이었다.
모텔에서 자두 농장까지 걸어서 찾아갔는데 대략 2시간은 걸어간 것 같다. 일꾼들을 잠재우기 위한 캠핑차량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옥외 수영장까지 딸려 있는 비교적 부대시설이 좋은 농장이었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한국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 - 그날 일을 나가지 않은 사람들 - 이 모두 한국인들이었고, 그들 말을 들어보니 이 농장의 일꾼 중 70% 이상이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Orange City 농장의 캠핑카는 임차료가 두 당(頭當) 일주일에 $20였는데, 이 농장은 $70나 되었다. 그래도 하루 $50가 넘는 모텔보다는 싸서 당장 숙소를 옮겨야 하는데 문제는 남아있는 캠핑카가 없어서 일주일치를 선급(先給)하고 누군가 농장을 떠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일행이 3명이니 3명이 농장을 떠나야만 캠핑카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인데 우리에겐 당장 210달러가 없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 모텔에서 식빵과 잼으로 아침식사를 해결하고 자두 농장으로 향하는 트럭을 잡기 위해 길목을 사수하고 있었다. 6시가 되기 전에 한 떼의 일꾼들을 싣고 달리는 트럭을 발견했고 무리 없이 올라탈 수 있었다.
체리나무의 높이도 평균 11m나 돼서 개인마다 사다리를 지급받았는데 자두나무도 거의 같은 높이여서 우리 팀은 3개의 사다리를 받았다. 하지만, 나는 -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 우리 중 한 사람만 사다리를 타라 지시했다. 나보다 키가 작은 남학생한테는 바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위에 매달린 자두만 수확하라 지시했고, 여학생은 밑에서 손이 닿는 높이까지만, 그리고 내 키가 제일 크니 나도 내 손이 닿는 부분까지만 수확하게 되면 한 사람만 사다리를 타고도 한 나무의 자두를 모조리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수확한 - 한 자루에 10kg씩 나가는 - 자두를 들고 사무실 앞 저울까지 달려가서 무게를 체크하는 일과 나무를 옮겨갈 때마다 같이 옮겨가야 하는 무거운 사다리도 내가 맡았다. 그렇게 일사불란하게 일한 덕분에 따로따로 일하는 다른 3명의 일꾼이 3그루의 나무를 수확하는 동안 (3명으로 이루어진) 우리 팀은 같은 시간에 적어도 4그루 이상의 나무들을 정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첫날부터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30%가 채 안 되는 백인 중 대다수가 수확을 하다말고, 즉 낮은 높이에 매달린 손쉬운 열매들만 거두고는 새 나무로 옮겨가고 있었는데 (* 체리 농장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단 하나의 열매라도 남아있으면 나무를 옮겨갈 수 없다.) 그 사실을 알고도 눈감아주는 것인지 농장주는 한국인들만 감시하고 한국인들한테만 잔소리를 퍼붓고 있었다. 참다못해 내가 나서서 바로 내 눈앞에서 얌치 행위를 벌이는 자들을 농장주한테 직접 지적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농장주는 그들의 파렴치한 행위는 묵인하고 그들이 수확을 하다가 만 나무들을 모두 한국인들한테 맡겼다. 우리 팀도 예외가 아니었다. 확연히 드러난 인종차별…. (* 관광객이나 유학생의 신분으로는, 그리고 교포사회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호주의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언급하겠다.)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무게를 측정하고 (그들이) 수확량을 기록하는 것이 다소 미심쩍어서 확인해보니 무려 20kg이나 차이가 났다. 사람의 일이라 실수가 있을 수 있겠지만 2kg의 차이도 아닌 20kg의 차이는 수긍할 수 없는 문제라 항의를 하자 농장주가 달려왔다. 나는 우리 팀이 8kg의 수확량을 올리는데 소요되는 시간과 마지막 무게가 정확히 얼마였다는 설명과 함께 사라진 20kg의 보충을 요구했는데 농장주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일하기 싫어? 그럼 떠나!"였다. 나는 당장 떠날 테니 지금까지 일한 것에 대한 임금을 당장 내놓으라고 호통을 쳤다. 농장주는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네 마음대로 그만두고 떠나는 것이라 임금은 줄 수 없다!" 나는 내 큰 눈을 더욱 크게 부릅뜨고 더욱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래? 그렇다면 시드니로 내려가서 법적 소송을 제기할 것이다. 두고 봐라!"
고소문제가 언급되자 농장주가 꼬리를 내리고 결국 임금은 지급해주었지만 나는 농장주한테보다 오불관언이었던 한국인들한테 더 분노했다. 내가 혼자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어느 한국인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나를 만류했다.
"저기요,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니까 웬만하면 참고 일해요."
"우리는 힘없는 한국인이잖아요."
"저는 영어가 안 돼서…."
"저는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은 알지만 어쩔 수가 없잖아요."
이렇게 그들의 변명도 가지각색이었다. 그곳에는 분명히 70%가 넘는 한국인이 일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나를 도와 일제히 들고일어나면 - 열대지방에서는 수확시기를 일주일만 놓쳐도 막대한 손해를 입기 때문에 - 우리의 권리를 찾는 것은 시간문제였는데…. 어쩔 수 없는 민족성인가? 나의 사고가 잘못된 것인가? 내가 농장을 떠날 때 나를 똑바로 바라본 한국인은 아무도 없었다. (* 2달이 넘게 이 사건은 진이라는 한국인과 호주 농장 측과의 대전쟁이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닌 전대미문의 사건이 되었고, 훗날 그들 중 한 사람이 내게 - 나와 싸움을 함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 사과를 했다.)
1997.12~1998.5 호주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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