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이 넘은 어머니의 주검 앞에서 슬피 흐느끼는 - 희수를 바라보는 - 한 늙은 아들의 망극지통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요절하는 숱한 가여운 영혼들도 있는데, 그만큼이나 수를 누리고 호상을 치르면 슬픔이 덜할 줄 알았다. 그러나 고인과 함께했던 세월이 길면 길수록 뒤에 남은 자의 슬픔이 더 깊어진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사연이 많을수록 아픔도 크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 이모와의 마지막 통화 -
"진규도 장가를 가야 할 텐데."
"안 가면 어때요. 상황이 호전되어서 어서 출국만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 진규한테는 매여 있는 삶이 맞지 않으니까 넓은 세상에서 마음껏 뜻을 펼치려면 혼자 사는 것도 괜찮겠다. 늦게라도 인연을 만나면 그때 가도록 하렴."
"시세는 알아보았니?"
"오르고 있으니까 더 관망해보죠. 이미 매점이 시작되어서 앞으로 더 오를 기미가 보이니 조금만 더 고생하면 될 것 같아요."
"그래. 어서 그렇게 되어야 이모 형편도 풀리고 진규도 사업을 시작하지."
- 곤지암 이모와의 통화 -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니?"
"아직 어려워요."
"빨리 풀려야 할 텐데…. 정국이도 한동안 고전하다가 이제 자리를 잡아가는 모양이다. 정관이도 출국했잖니. 진규도 어서 떠나야 할 텐데 경제가 이 모양이니…. 사귀는 여자는 없니?"
"인연도 없지만 별 뜻이 없어요."
"그래, 결혼 안 하면 어떠니. 잘못하면 족쇄만 차게 되는 거니까. 혼자 살면서 세계를 누비고 사는 것도 괜찮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 임종하시기까지 세대차이를 전혀 느끼지 못했던, 아니, 오히려 역으로 느낄 만큼 시대를 훨씬 앞서 사셨던 - 내 어머니와 오래도록 외국생활을 하셔서 보편적인 어른들과는 아주 다른 사고방식의 소유자이신 이모, 그리고 어머니의 의자매이신 곤지암 이모로부터 배웠다. 어느 진취적인 젊은이들이라도 세 분의 기상을 따를 자가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 내가 말하는 젊은이란 20~30대에 국한된 것이 아닌, 세 분보다는 젊은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의 젊은이다.) 그 핏줄을 그대로 물려받은 내가 이 땅에서 또래의 친구들이나 더 젊은 친구들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모순으로 가득한 이 답답한 사회구조 속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세 분은 내 목마름을 언제나 속 시원히 해갈시켜주시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이(셨으)니 내가 세 분을 얼마나 존경하고, 허물없이 지내왔는지는 더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세 분은 모두 장부의 기질까지 타고나셔서 한집안의 어머니 역할은 물론이거니와 가계를 이끌어오신 가장의 역할까지 하시면서 당신 자식들을 석박사로 키우신 것, 그리고 - 주위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 일찌감치 자식들을 넓은 세상으로 내보내신 것까지 일맥상통하시니 세 분간의 정도 각별할 수밖에 없다.
간밤에 아르헨티나에서 사촌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녀석들이 어렸을 때 이민을 해서 첫째, 둘째 모두 가정을 꾸리고 아버지들이 되도록 서로 얼굴들을 못 보고 살다가 포천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에서 상봉한 뒤로 다시 10년이 흘렀다. 뜻밖의 전화라 반갑게 받았는데 녀석의 목소리가 밝지 않았다.
"형...."
"그래 별일 없지? 이모는 안녕하시..."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 믿을 수 없는 이모의 부음. 어머니의 죽음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데 이모까지 그렇게 떠나셨단 말인가. '아냐. 아냐. 그럴 리 없어. 엊그제 들은 당신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한데….' 어떻게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나.
무언가를 쓰고 싶은데, 글로써 할 수만 있다면 무너진 억장을 달래고 싶은데, 천학비재한 글재주로는 이 슬픔과 억울함을 묘사할 표현조차 찾을 수가 없다.
밤새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부인하다가 어머니와 이모, 두 분을 위한 음식을 요리해서 간소히 제를 올려 드렸다. '두 분, 함께 중국을 다녀오시면서 마지막 여행이 될 것 같다고 말씀들 하시더니…. 복선이 되고야 말았군요. 무거운 마음 두고 떠나셨지만, 그곳에서는 부디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편히 계셔야 해요.'
2006.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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