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an의 眞한 이야기/Jean의 眞한 이야기

피에로의 슬픔 -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Jean2 2011. 5. 10. 20:02

 

피에로가 익살을 부릴 때마다 관객들은 박장대소했지만, 소년은 웃지 않았다. 만약 웃었다면 그건 - 피에로의 위장된 연기에 상응하는 - 가식적인 웃음이었을 것이다. 그의 우스운 표정과 동작에서 아무도 슬픔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린 소년만은 그의 해학 속에서 형용할 수 없는 비애를 느끼고 있었다. 그가 (각본에 짜인) 실수를 연발할수록 관객들의 폭소도 커졌는데 그럴수록 왠지 모를 측은지심이 어린 소년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소년이 피에로에게 물었다.

"아저씨는 왜 그렇게 사람들을 웃기..."

"아저씨가 슬프기 때문이란다."

"...시나요?"

소년은 당혹했다. 질문하기가 무섭게, 아니, 어린 소년의 짧은 문장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그가 답을 던졌기 때문이다. 그는 무표정하게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는데 분장 때문에 마치 환하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슬퍼서 남을 웃긴다니?' 소년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분장은 왜 그렇게 웃기게 하시나요? 바보 같아요."

 

'바보'라는 단어 때문이었는지 피식 웃는 그의 얼굴이 더욱 바보 같았고 애처로워 보였다. 피에로는 묵묵히 허공을 응시하다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 연기가 부지런히 허공에 수를 놓고 나자 그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의 얼굴에는 웃음이 없기 때문이란다. 너도 나이를 더 먹으면...."

그는 다시 담배 연기를 내뿜기 위해 말을 중단했다.

"....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단다."

뿌연 연기가 흩어지기 전에 그가 다음 문장을 완성했는데 '있을지 모른다.'라는 다소 자신이 없는 표현을 사용했다.

 

천막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바람이 그가 허공에 열심히 그려놓은 그림을 흩뜨려놓자 그는 새 개비를 꺼내 물고 성냥을 당겼다.

"아니다."

다시 그의 추상화가 펼쳐지기 시작하자 그도 말문을 다시 열었다.

"그건 나이와는 상관없는 것이지. 오래 살았다고 해서 세상을 더 아는 것은 아니거든. 편하게만 살아온 사람들도 나름대로 다들 고민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진정한 고뇌가 어떤 것인지 모르지. 세상에는...."

 

그다음 부분을 빨리 듣고 싶었지만 소년은 재촉하지 않았다.

".... 어린 너보다 세상을 모르는 어른들로 가득하단다."

"저보다요? 그걸 어떻게…."

소년은 당황해서 물었다.

"얘야, 네 손은 여자 손같이 참 예쁘구나. 손톱과 손가락이 너처럼 긴 사람이 재주가 많은데…."

소년은 부끄러워서 손가락을 오므렸다. 그러나 그의 칭찬 때문에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수도관도 없는 집에 살아서 저녁마다 무거운 양동이로 원거리에서 필요한 물을 나르느라 어른들보다 깊게 박여 있는 굳은살은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 손을 보렴. 네 손과 다르지 않을 거야."

그가 손등을 소년의 눈앞에 펼쳐 보였는데 길쭉길쭉한 것이 정말 예술가의 손이었다.

"여자들도 부러워하던 손이었지. 그러나...."

다시 푸 연기를 내뿜는 모습이 소년에겐 한숨을 토해내는 슬픈 영화의 한 장면만 같아서 가슴이 아렸다.

".... 안쪽에 깊숙이 박여 있는 굳은살은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지. 하지만 너는 잘 알 거야. 네 손 안쪽에도 아저씨의 것과 같은 것이 있으니까." 소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어쩌면 소년의 마음을, 고통을 모조리 꿰뚫어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은 피에로의 짐작대로 이미 세상의 많은 고통을 알고 있었다. 기쁨을 알기 전에 슬픔부터 배웠고, 포만감을 알기 전에 배고픔부터 배웠고, 진수성찬 앞에서도 반찬 투정을 부리는 철부지들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배고픔을 참는 법'을 배운 소년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이만 먹은 어른들은 그저 '어린것이 뭘 아느냐?'라고 소년의 의사를, 감정을 철저히 뭉개버렸지만, 피에로는 그런 소년의 아픔을 간파하고 있었다. 바보 같은 모습을 하고 바보짓을 해서 사람들을 웃기는 그가 바보가 아니라 정작 바보들은 그의 미소 뒤에 감춰진 슬픔을 발견하지 못하는 어른들이었다.

 

 

2005.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