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an의 眞한 이야기/Jean의 眞한 이야기

새벽에 날아온 비보

Jean2 2011. 5. 9. 13:16

이른 새벽에 작은누나로부터 비보가 날아들었다. 암으로 투병 중이셨던 큰누나의 시아버님께서 갑작스레 운명하셨다는 것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식사도 잘하셨고 항암치료도 의욕적으로 받아오셨는데 결국은 항암제의 부작용을 피해 가지 못하셨다.

 

여동생만 어린 조카들을 보살피도록 남겨두고 아버지와 나, 작은누나, 둘째 자형까지 KTX에 몸을 싣고 부산으로 향했다. 14년 만에 밟아보는 부산이지만 마치 내 고향처럼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건 군대 동기 중 절반 이상이 부산출신인데다가, Jean's English Clinic 카페 회원 중 상당수가 부산에 살고, 그리고 무엇보다 캐나다에서 만난 마지막 애인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를 잊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을지 모르지만, 난 아직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고 있다. 아니 굳이 열지 말아야겠다는 내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열리지 않는다.'라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 다음으로 그녀만큼 사랑했던 여자는 없었으니까…. 장례식장마저 그녀의 출신교인 동아대병원이라 그녀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동아대병원 내과의로 근무하고 있는 현아의 얼굴이라도 보고 가려고 몇 차례 문자메시지를 발송했으나 바뀐 전화번호라 연락이 닿지 않았다. 

 

어머니상을 치르느라 큰누나와 첫째 자형도 지난달 고생을 많이 했고 아직 사십구재도 치르지 않았는데 또다시 큰일을 치르고 있는 큰누나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가난한 집안의 맏딸로 태어나 호강스럽게 자라지도 못한 누나지만 큰누나는 한 번도 현실을 비관한 적이 없고 가계를 돌보면서도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다. 그리고 누나의 의지대로 목표했던 꿈들을 이룩해왔다. 내겐 참 자랑스러운 누나이다.

 

내가 처음 대체의학, 자연의학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군 복무 시절인 1988년부터였다. 입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철이 덜 들어서 부모님 건강엔 거의 무관심하다가 어머니께서 면회를 오실 때마다 늘어나는 흰 머리카락과 주름살을 볼 때면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고 어서 빨리 시간이 흘러 제대를 했으면 좋겠다는 소망 대신 - 해박한 지식을 축적하기엔 30개월이 너무 짧은 시간이고, 또 제대할 때쯤이면 더 늙어계실 어머니, 아버지 모습이 떠올라 - 오히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길 염원했다. 군대라는 특수사회의 특성상 공부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는 없었지만, 관련서적들을 틈틈이 독파하면서 메모해두고 전우신문이나 사제신문들의 건강칼럼들도 스크랩해두었다가 매주 어머니께 띄워 드렸던 편지에 첨부해 드렸다.

 

2002년 봄, 어머니의 암이 재발해서 세브란스에 입원해 계시는 동안 온갖 자료들을 수집해서 더욱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고, 대체의학에서 주장하는 항암치료의 부작용들이 - 어머니의 항암치료과정에서 나타나는 증상들과 - 1%도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고 서양의학의 모순점과 한계성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그런 잘못된 부분들과 대체의학 치료에 대해서 진지하게 면담을 하고 싶었지만, 어느 의사도 귀담아들어 주기는커녕 철저히 내 의사를 무시해버렸다.

 

유럽과 호주에서도 대체의학 이용률이 50%를 넘고, 우리나라보다 의학기술이 월등히 앞서 있는 미국에서도 하버드 의대를 비롯한 많은 의과대학에서 대체의학을 활발히 연구하고 실제로 대체의학 치료를 시행하고 있는데 왜 우리나라의 제도권 의사들은 그렇게 폐쇄적이고 시대 역행적인 의료체계를 고수하는 걸까?

 

시간을 - 항암치료를 막 시작했던 - 2002년 6월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감히 확신하건대 난 어머니를 '살릴 수 있다'. 내 어머니보다 증세가 훨씬 미약한 암환자들이 3개월, 6개월도 안 되어서 유명을 달리하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집행일보다 2년을 더 사셨고,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내가 행해왔던 수백 가지 방법 중 일부만이라도 시도했던 암환자들은 거의 다 증세가 호전되거나 최소한 선고받은 잔여수명을 늘릴 수 있었으니….

 

 

2004.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