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학습/영어 학습 비법

성인들의 영어학습은 왜 힘들까?

Jean2 2009. 12. 28. 15:41

정서정류장치'라고 할지 아니면 '감정여과기'라고 해야 할지, 하여간 Affective Filter라는 말은 지금부터 약 20여 년 전 Steve Krashen이라는 언어학자가 쓰기 시작한 말이다.


그는 인간의 감정 또는 사고의 체계 속에는 감성과 정서를 여과하는 장치가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이 감정여과기의 성능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웬만한 것은 다 걸러내는데 비해 다른 어떤 사람은 아주 작은 것들도 여과시키지 못해 애를 먹는다.


예를 들어, 여러 사람 앞에서 연설하거나 노래하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그 사람의 반응을 들 수 있다. 주저하지 않고 넉살좋게 잘 하는 사람은 어펙티브 필터가 낮아 웬만한 건 다 통과시키는 사람이고, 그 반대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다.


물론 여기에는 성격, 가정교육, 문화적 배경들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데, 일반적으로 어린아이보다는 어른이 어펙티브 필터가 더 높아서 외부로부터 들어온 '외국어'라는 새로운 input을 잘 여과시키지 못해 애를 먹게 마련이다.


성인이 된 후에 외국어를 배우기가 힘들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심리적인 요인이다. 이때는 이미 정서적으로 상당히 성숙한 데다가 그 사회의 문화와 관습에 젖은 상태이므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가 전처럼 수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두고 Affective Filter가 높아졌다고 표현한다. 이미 15세 때에도 뛰어넘기 어려운 심리적 장벽은 성인이 된 후에는 더 두텁고 높아져서 극복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하나의 언어를 배운다고 하는 것은 그 언어가 속해 있는 지역의 문화와 역사와 관습까지도 흡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자기 것에 익숙해진 성인으로서는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게다가 아주 다른 형태의 어투와 발음을 흉내내는 것이 쑥스럽고 부끄럽기까지 하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실수를 두려워한다는 것. 아이들처럼 아무 말이나 지껄여 보는 것이 아니라 혹시 틀리지나 않을까 남이 못 알아듣지나 않을까 걱정하다 보면 입이 떨어지지 않게 된다. 어른이 되어 외국어를 배우기가 어려운 것은 기억력이나 이해력 이전에 바로 이와 같은 심리적 요인이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이다. 즉 정서정류장치가 강하게 작용한다는 말이다.


'우리 사람...좋아해.'하는 식으로 말하던 한국내 중국 화교들의 서투른 한국말은 제대로 배우지 않아 엉터리가 되어 버린 외국어의 좋은 사례이다. 좀더 제대로 된 말을 해보겠다는 의식적인 노력 없이 단어만 나열해서 의사소통이나 하자고 든다면 우리의 영어도 결국 화교들이 하던 한국말과 다를 것이 없게 된다.


미국에서도 영어 때문에 고통받는 교포들이 많이 있다. 한국에서는 조기유학이다, 직장인 해외연수다 해서 너도나도 영어를 배우러 미국에 간다고 야단인데, 정작 미국에 와서 살고 있는 교포들은 영어를 잘 못한다. 미국에 한두 해 산 것도 아니고 10년, 20년씩 산 사람들 중에도 이런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왜 그럴까?


대답은 간단하다. 미국에 산다고 해서 무조건 영어가 능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어른이건 아이건 노력하지 않으면 외국어는 늘지 않는다. 아이들의 경우에는 자기 또래 집단과 어울리려는 욕구가 강하므로 그만큼 언어를 배워야 할 필요성도 절박하다. 그에 비하면, 어른들은 먹고 살 만큼만 의사소통이 되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 특히 한국 교포들 중에는 수퍼마켓이나 세탁소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은 대부분 장사에 필요한 수준의 영어만 할 수 있게 되면 거기에 만족해 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른들은 영어를 배우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별로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은 어른들이 아이들보다 더 비장한 각오로 더 많이 노력해야 하는데도... 한국에 살든 미국에 살든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영어 실력은 늘지 않는다.

 

 

글쓴이 - 하광호 (뉴욕주립대 영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