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an의 眞한 이야기/Jean의 眞한 이야기

나를 부러워하는 이들과 죄를 범한 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Jean2 2011. 5. 9. 14:18

어머니께 제를 올리고 나서 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이삿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는데 새집은 환경이 조금은 더 좋은 대신 비좁아서 더 많은 짐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캐나다에서의 불법체류생활을 마치고 막 귀국했을 때 두 분이 살고 계셨던 단칸방은 더욱 협소해서 - 다시 호주로 날아가기 전까지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했던 3주간은 - 짐을 풀 엄두도 내지 못했다.

 

평생 남부럽지 않은 부를 누리고 살아본 적은 없지만, 어머니의 피눈물 나는 노력과 천부적인 능력으로 한때는 큰집에서 살기도 했다. 무허가 판잣집 생활부터 시작해서 6가족이 1년에 열두 번도 더 이사해야 했던 서러운 단칸살림 속에서도 누이들을 석박사로 만드신 분이고 당신의 아들은 절친한 친구들도 시샘하던 미국 유학생이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다더니 어머니의 은혜를 오래도록 입어왔던 인간들이 우리 집안을 이렇게 몰락시킬 줄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었다.

 

다락방에서 낡은 가재기물들을 꺼내느라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는데 잠시 땀 좀 식히라는 신호인지 휴대전화기가 울음을 터뜨렸다. MSN 사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홈피관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베스트 홈피로 선정되고, MSN 홈피의 광고모델이 되어달라는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머뭇거림도 없이 승낙하고 말았다.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한 꾸러미의 편지와 언제 써놓으셨는지 모를 어머니의 자필 원고, 그리고 나의 28개국 행선지를 날짜별로 정확히 추적할 수 있는 어머니의 일기장을 발견했다. 또한, 오래전 내가 신병교육대에 입소하기 전에 군복을 지급받고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집으로 보낼 때 사용했던 낡은 소포 지와 신병교육대 시절부터 병장 제대할 때까지 보내드렸던 이기자 부대의 마크가 선명하게 찍혀 있는 수건들도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입술을 깨물었다.

 

한 통 한 통 136번 훈련병으로 시작해서 병장계급으로 무사히 군 복무를 마치고 귀향할 때까지 어머니께 바친 편지들을 읽다가 베갯잇을 펑 적시고야 말았다. 오랜 세월 어머니께서 그토록 소중히 간직하고 계셨던 편지 꾸러미 속에서 내 직속상관이었던 김 중대장이 어머니께 보낸 서신들도 상당수 발견되었는데 그건 어머니께서 나 모르는 사이에 중대장한테 띄우신 편지가 그만큼 많았음을 의미함이다.

 

어머니는 글재주가 참 뛰어나셨다. 글재주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운동까지 다방면으로 - 객관적으로 인정을 받으신 - 달인이셨다. 언변에 있어서는 검사, 변호사들도 진땀을 흘리고 말문이 막힐 정도로 청산유수여서 감히 대적할 자가 없었다. 그런 재주를 4남매가 고루 나눠 갖긴 했지만, 최소 2가지 이상은 아무도 어머니를 아직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께서 내게 띄워 주신 편지들에는 늘 '사랑하는 내 아들 진규에게'로 시작해서 '사랑하는 엄마로부터'로 끝맺음이 되어 있었고 편지 중간 중간에는 당신의 자작시가 빠져 있는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어머니의 편지를 기다리는 만큼 전 중대원들도 당신의 감동적인 편지를 손꼽아 기다리고 돌려 읽는 것을 낙으로 삼을 정도였다.

 

어머니의 일기장을 열어보니 페이지마다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에 사랑하는 아들이 포르투갈에서 전화하다.' 식으로 내 행선지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었고, 내가 어느 땅을 밟고 있든지 항상 함께 하셨음을, 그리고 내가 늘 어머니를 그리워한 이상으로 당신도 못난 아들을 오매불망 그리워하고 계셨음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가슴속 깊이 사무친 사연들을 기록하는 일조차 서럽지만 내 글을 반드시 읽어야 하고 어머니의 영정 앞에서 백배사죄를 해야 할 죄인들이 있기에 이 작업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긴 이야기를 다는 기록할 수 없지만 내가 왜 강산이 변하도록 조국에 돌아올 수 없었는지 간략하게 공개하겠다.

 

 

95년 3월 17일 일기
겨울 학기도 가까스로 평점 97%, 4.0/4.0 만점으로 막을 내렸다. 흡족한 성적이긴 하지만 '가까스로'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할 만큼 힘겨운 싸움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행복한 시간은 일찍이 가져본 적이 없다. 비록 한 자루에 $1.50인 싸구려 감자와 39센트짜리 식빵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있지만 3개월만 더 버티면 졸업이다. 4.0/4.0 목표했던 전체수석으로 말이다.

 

95년 3월 18일 일기
어머니와 침울한 통화를 했다. 그렇게 친분이 두터웠던 혜영이 어머니가 공금을 횡령해서 도주하셨단다. 어머니께서 학업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못하시고 끊으셨지만 아무래도 공부를 중단해야만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 조금만 더 이 행복이 지속하였으면...

 

 

결국, 학업을 중단하고 언제 돌아오겠다는 기약도 없이 유타주를 떠나야 했다. 유타가 내 성격과는 맞지 않는 주라 개인적으로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영웅'이라는 칭호를 얻을 만큼 피 끓는 청춘을 멋지게 장식했던 곳이니 그 아쉬움과 억울함을 내 짧은 언어로는 다 표현할 길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귀국을 며칠 앞두고 영남사 아주머니가 또 거액의 공금을 횡령한 뒤 행방불명되었다. 서울지방법원에서는 눈에 보이는 모든 가구에 압류표시의 딱지를 붙여놓았고 집은 채권자들의 점령지가 되어 있었다. 폭력배가 어머니의 멱살을 붙잡고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욕설과 함께 끌고 나가도 저항할 힘이 없었고 그들 앞에서 무릎을 꿇으신 아버지의 눈물 어린 호소도 무자비하게 짓밟혔다. 하루하루가 생지옥이었다.

 

그렇게 굴욕적인 삶을 사느니 죽는 게 낫겠다고, 함께 세상을 뜨자고 울부짖었지만, 어머니는 당신 아들의 삶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하셨다. "너만은 이 지옥을 빠져나가서 살아남아라." 어렵게 장만하신 50만 원을 손에 쥐여주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어느 불효자식이라도 어머니가 그 지경에 계시면 떠나지 못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만, 나는 매정하게 떠나야만 했다. 내 금융권은 모조리 박탈당했고, 채권자들의 점거와 농성, 압력으로 내가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생지옥에 남겨두고 뒤돌아보지 않고 매몰차게 길을 나섰지만 흐르는 눈물은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유타주로 돌아가는 편도 비행기 표와 50만 원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복학을 명목으로 유타주로 위장입국을 한 뒤 6개나 되는 suitcase를 끌고, 짊어지고 뉴욕에 도착했을 때는 단돈 1센트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중략)

 

생면부지의 교포 집에서 서러운 더부살이로 시작된 뉴욕생활을 접고 다시 호주로 날아갔을 때에는 100달러와 한 달 내로 갚아야 할 4,000달러의 빚이 내가 가진 전 재산이었다. 뉴욕에 일부 짐을 남겨두고도 80kg이나 되는 짐을 끌고 와서 짊어지고 다니느라 어깨엔 굵은 줄 자국이 사라질 날이 없었지만 내 어깨를 짓누르는 건 가방의 무게가 아닌 혹독한 삶의 무게였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일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진저리나도록 체험하고 나서야 알았다. 하루 한 끼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15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리다 보니 하늘이 내내 노랗게 보였고 하루 두, 세 시간의 새우잠을 자고 눈을 뜨면 영락없이 열 손가락이 안으로 굽어진 채 굳게 굳어 있어서 새벽마다 그것들을 펴느라고 한참 씨름을 해야 했다.

 

그래도 간간이 어머니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으면 어떤 고통도 시련도 견딜 수 있었다. 상황이 악화할수록 난 어머니께 더 많은 - 잘 먹고 편안히 잘 지낸다는 - 거짓말을 했고, 그건 - 생지옥에 남아계신 - 당신께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굴욕적이고 치욕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강제로 내 등을 떠다민 분이 아니셨던가!

 

어느 을씨년스러운 아침, 밤새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공중전화부스로 달려갔는데 아니나다를까 더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여러 차례 정확한 번호를 반복해서 눌렀지만 없는 번호란다. 둘째 누이로부터 결국 구속을 당하셨다는 비보를 듣고 전화부스를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시드니의 한복판에서……. 나를 지나치는 숱한 사람들의 시선도 내 슬픔을, 분노를 감추지 못하게 했다.

 

 

To 정환 어머니
저희도 선의의 피해자인데 고소하셔서 속이 후련하셨습니까? 고소만 하시면 돈이 나오리라 생각하셨겠지요. 제가 외국에 나가 있으니까 혹시나 돈을 챙겨서 도피했다고 생각하셨겠지만 오산입니다. 저희는 그렇게 비양심적인 가족이 아니랍니다. 혜영 어머니와 영남사 아주머니의 공금횡령으로 말미암아 구경도, 써보지도 못한 거액의 돈을 갚아야 하는 참으로 억울한 입장이었지만, 어떻게든 갚아 드리고자 온 힘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언젠가는 다 받으실 수 있는 돈이었는데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나요? 제 어머니는 구속을 당하시기 전부터 아주 편찮으셨는데 교도소에서 암까지 얻으셨고 끝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오래도록 아주머니를 참 좋은 분이라 생각했는데 저희가 어려움에 부닥치게 되니까 본색이 드러나는군요. 정환이 얼굴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제가 정환이의 선생이기도 했으니까요. 아드님한테도 어떤 불행한 일이 닥칠지 내일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To 은정 어머니
저희가 피아노 학원을 운영할 때 학원 앞에서 마음 놓고 풀빵 장사를 하시도록 저희는 크게 배려해 드렸고 세 따님도 제 어머니의 피아노 수업을 받았죠. 그뿐만 아니라 학력 미달로 풀빵 장사밖에 하실 수 없는 부군을 제 아버지께서 좋은 직장에 취직도 시켜주셨고…. 그래서 그렇게 살림이 피기 시작한 것이지요. 아주머니 형편이 어려웠을 때 저희는 그렇게 베풀었는데 아주머니는 은혜를 어떻게 보답하셨나요? 제 어머니께서 목디스크 진단을 받으시고도 수술비가 없어 통증 치료만 받으시러 가신 분한테 병원까지 쳐들어오셔서 그 많은 사람 앞에서 돈을 내놓으라고 횡포를 부리셨죠. 가슴에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면 그리할 수 없는 겁니다. 제 어머니를 괴롭히는 것으로 부족해서, 제가 미국 유학을 하느라고 집을 말아먹었다고 제게도 피를 말리는 고통을 주셨지만, 과연 그럴까요? 사악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시면 언젠가는 죗값을 치르게 될 겁니다.

 

To be continued

 

2004.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