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잠잠하다가 다시 몰지각한 회원들의 수가 불어나기 시작했다.
"어느 사이트를 뒤져봐도 무료로 번역해 주는 곳이 없더군요. 그러니 주인장님이 좀 도와주세요." 따위의 염치없는 글들이 버젓이 게시판에 올라오기 시작했고, 며칠이 지나도록 내가 간단한 댓글조차 달지 않으면 영락없이 항의의 글이 뒤따랐다.
"도대체 왜 안 도와주시는 거죠?"
"뭐 이런 주인장이 다 있어요?"
"카페 운영을 하시려거든 좀 제대로 하시죠?"
자구책을 궁리하다가 한 번역사이트를 찾아서 공지사항에 다음과 같이 올렸다.
"주인장이 알아본 바로는 이 사이트가 가장 저렴하게 번역을 해주는 곳입니다. 이 회사에서는 '페이지'당 2만 5천 원의 번역료밖에 받지 않으니 이곳을 이용하시고, 그래도 굳이 주인장의 번역을 원하시는 분은 '한 문장'당 2만 5천 원을 받겠습니다."
내게는 부탁을 하지 말거나 대가를 치르라는 말이었다.
이후로 '메일이나 게시판에' 번역이나 영작숙제를 부탁하는 회원은 줄었지만 축출해야 할 회원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카페 작업을 하고자 카페에 접속하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카페ON을 띄워 카페 자료들과는 전혀 무관한 - 그들이 다니는 학원의 교재들, 학교 시험문제지, TOEFL, TOEIC과 관련된 - 숱한 질문들로 내 시간을 갉아먹고, 내가 꼭 필요한 일이 있어서 메신저에 접속을 하기라도 하면 보통 1분 안에 평균 4개 이상의 창이 12인치 노트북 화면을 가득 채워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한번은 제자들 앞에서 메신저에 접속한 적이 있는데 그들은 내가 노트북을 켜기 전에 1분 안에 몇 개의 대화창이 뜰지 내기했고, 결과는 적은 수를 부른 제자의 패배로 돌아갔다. 안부를 묻거나 고민을 상담하는 창은 몇 개가 되더라도 마다한 적이 없어서 한꺼번에 5개의 다른 창에서 제각각 올라오는 글들을 모두 읽고 동시에 이해하고 답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했다.
2001년 10월 유럽에서 임시 귀국하고 나서 재출국 준비하고 있던 2002년 1월에는 부산과 울산에서 두 명의 대학생들과 한 직장인 아가씨가 사직하고 상경해서 집중수업을 받던 때라 정신이 없었는데, 그 세 명 중 두 명은 영어 수업에 앞서 인간의 도리를 먼저 배워야 할 존재들이었다.
부산에서 올라온 남학생은 몇 달간 진행된 카페 채팅과 그가 남겨온 글들을 통해 내가 후한 점수를 주고 꽤 괜찮은 아우라고 오판한 철면피였다. 내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서울역에서 그를 처음 대면한 순간부터다.
서울역에서 부평으로 향하는 전철부터 시작해서 그가 수업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차비라는 차비는 모두 내가 내야 했고, 내 집에서의 하루 3끼 식사는 물론이고 녀석의 외출비, 외식비도 전부 내 주머니에서 지출되었다. 녀석을 데리고 유원지라도 다녀오는 날에는 하루 수업료의 3배나 되는 액수가 빠져나갔다. (* '제가 낼게요.' 정도의 말 한마디라도 한 적이 있다면 그리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녀석을 위해 건강도 안 좋으셨던 내 어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으시고 장을 보러 다니셨고 녀석의 고시원으로 음식 조달은 물론이거니와 녀석에게 빌려준 침구들도 당신께서 직접 세탁하셨다. 당시 집에 세탁기가 없어서 한겨울에 큰 이불을 세탁하는 것이 여간 힘들고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녀석이 수업료로 지급한 돈은 모두 녀석을 위해 쓰이고도 부족했지만 - 카페 채팅 때와는 달리 너무 수줍어해서 - 녀석의 잘못들을 일일이 지적해줄 수가 없었다. 자원봉사와 다름없는 수업을 진행하면서 화가 많이 났지만 - 녀석이 말은 못해도 내심으로는 미안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라고 자신을 달래면서 - 나는 사부로서의 도리를 다했다. 내 할 도리를 다하고 나서 충고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녀석의 뻔뻔함을 추종할 자는 없을 것 같다. 녀석이 떠나는 날이라고 어머니께서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마지막 진수성찬을 차려주셨는데 다 먹고 나서 녀석은 고개만 한 번 꾸벅하고는 집을 나섰다. "잘 먹었습니다. 그동안 폐 많이 끼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정도의 인사는 기본에 불과한 예의인데….
녀석을 위해 우리가 처음 만난 장소로 돌아가는 마지막 전철표를 끊어주었는데 서울역에 도착하고 나서 녀석은 줄도 서지 않고 부산행 기차비까지 내가 지급해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왜 줄을 안 서니? 표 사야지."
마지못해 줄을 서고 처음으로 자신의 돈으로 표를 산 녀석에게 마지막 점심을 대접하고 보냈다. 그리고 많은 생각을 정리해서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작성한 메일을 보냈는데 나를 힐책하는 장문의 설교 문이 날아왔다.
"형이 그런 분인 줄 몰랐는데 참 실망스럽군요. 손님이 왔으면 대접을 해주는 것이 마땅한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폐라고 생각하고 갚겠습니다. 하지만 인생을 그런 식으로 살지 마십시오..... (이하 생략)"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녀석과의 인연을 영원히 끊어버렸다.
반면 같은 시기에 올라온 - 현재 영어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 여학생은 한 번도 날 실망하게 한 적이 없고, 여러 해가 지나도록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자기 사랑은 자신이 받도록 행동함으로써 얻는 것이다.
두 사람의 수업을 마치고 출국을 위해 본격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중에 울산 아가씨가 수업을 요청해서 출국을 잠시 보류했다. 어머니의 병만 아니었으면 그녀 수업이 마지막이 되었으리라. 그녀는 제법 붙임성도 있고 예의도 바른 사람이라 생각돼서 역시 그녀를 위해서도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어머니의 노력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갑자기 걸음을 옮기지 못하시고 주저앉으셨다. 그때 나는 강의 중이라 그 광경을 지켜보지 못했고 뒤늦게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내가 달려간 곳은 롯데백화점이었다.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셨던 못난 아들에게 필요한 운동화와 샌들을 보러 가셨다가 그리되셨고, 내가 달려올 때까지 - 새 운동화와 샌들을 받고 기뻐할 내 모습만 상상하시면서 - 신발 두 켤레를 꼭 쥐신 채 고통을 달래고 계셨다.
백병원으로 모시고 갔는데 (* 당시 경황이 없어서 어머니께 아주 불친절하고 무례하게 굴던 못된 간호사를 나무라지도 못했다.) 의사는 증상이 심상치 않으니 자궁암 수술을 받으신 병원으로 가는 게 좋겠다는 진단을 내렸다.
다시 세브란스로 모시고 갔다. 내가 하루 1시간 반의 수면도 취하지 못하고 - 그것으로 말미암아 수시로 날 괴롭히는 두통과 안통과 싸우면서 - 일만 해야 했던, 그래서 잠을 자는 것이 소원이었던 땅인 캐나다 생활을 하는 동안 그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수술과 항암치료를 홀로 감당해내셨던 그 병원으로…….
외가 식구와 누이들, 자형들까지 모두 연세대 출신이고 둘째 외삼촌은 의대 교수로 재직 중이시다 보니 세브란스에서는 오래도록 특혜를 입어와서 아무 기다림 없이 어머니의 검사와 입원 절차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방사선치료와 항암치료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아가씨의 수업을 강행했는데 선급 되어야 할 수업료가 어느 날부터 안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머니 문제로 수업을 얼마나 더 받을 수 있을지 모르니 후지급으로 하겠단다. 그보다 더 괘씸한 것은 3개월이나 자신을 돌봐주신 어머니의 병문안을 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돌.
2006.3.31
'Jean의 眞한 이야기 > Jean의 眞한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타산지석 4 (0) | 2011.05.15 |
---|---|
타산지석 3 (0) | 2011.05.15 |
타산지석 1 (0) | 2011.05.13 |
왕란이 두 판에 오천 원? [3] (0) | 2011.05.12 |
왕란이 두 판에 오천 원? [2] (0) | 2011.05.12 |